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STAFF

복분자 수확 즈음


어렸을 때 우리집은 번듯한 기와집에 마당이 아주 넓어 맨드라미, 봉숭아, 목련..그리고 이름 모를 꽃들이 사철 피었다 졌고
뒷 마당엔 몇 십년된 감나무가 무성해서 어렸을 땐 항상 시컴함 그 뒷마당이 무섭기까지 했는데 가을마다 감은 주렁주렁 많이도 열렸었다.
강호동이가 들어가도 남음직한 장독 몇 개에 감을 그득그득 담아 놓으셨던 할머니가 생각나네. 어렸을 땐 나만 미워하는 할머니를 참 싫어했었는데. 생각해보면 할머니가 계셨을 때가 우리집의 전성기였던 것 같다.
그 뒷마당엔 딸기도 열렸었기에 몇 번 따먹은 기억도 있다.
아, 앞마당 한쪽엔 심지어 돼지우리도 있었고 돼지도 몇마리 키우기까지 했. 이건 좋은 기억은 아니고;;
(어린맘에 어찌나 양옥집에 살고 싶었던지) 그 넓은 집에 대한 기억은 대부분 벗어나고 싶어했던 좋지 않은 기억뿐이지만 추억만큼은 아름답기만 하다.
햇볕이 좋은 날 마루에 누워 빈둥거리던 때의 나무 냄새가 나 코 끝이 찡하네.
당시 우리는 바나나 농사를 지었었다.
시골에서 벼농사는 당연한 거였고 특용작물로 바나나가 간택되었는데 밭에 엄청나게 큰 비닐하우스가 세워졌고 바나나를 키우기 위해 나름 첨단 설비들이 설치됐고 그 하우스에 바나나 나무가 빽빽하게 서 있는 풍경은 지금 생각해도 참 신기하면서도 뿌듯하고 자랑스러운 것이었다. 그렇게 우리는 부자가 된 것 같았다.
그 뿌듯함도 잠시. 어느날 갑자기 바나나가 똥값에 수입되었고 우리집은 그 때 사실상 망한게 아니었는지 짐작 해 본다.
그 후 20년가까이 수박 농사를 지었지만 빚 위에서 지은 농사라 엄마 아빠는 끝까지 버틸 수가 없으셨고 평생 살아오신 고향을 등지고 맨 몸으로 낯설은 곳으로 이사를 하셨다.
마침 부모님이 이사가신 순창은 한참 복분자 재배를 시작한 지역이었던지라 엄마 아빠도 어렵게 땅을 구해 복분자 농사를 시작하셨고 새인생 시작하는거라 생각하고 몇 년은 활기차게 지내셨는데.
올해 초, 꽃을 피울 때 쯤 불어닥친 한파 때문에 복분자를 거의 잃고 또 다시 실의에 빠져 계신다.
나 힘들 땐 엄마아빠 등골 다 빼먹고 정작 엄마아빠가 힘들 땐 딸로써 할 수 있는 일이 없어 암담하고 절망스런 이 현실 앞에서 너무 괴롭고 참담하기까지 하다.
부디 엄마 아빠가 이 위기를 무사히 넘겨 앞으로는 행복한 일만 있고 한숨 쉴 일 없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다.